만수국 씨를 싹 틔워 화분에 옮겼더니 아주 잘 자라서 꽃이 쉬지 않고 핍니다.
이민 오자마자 처음 들인 스피커가 "쿼드 57"이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크레이그"라는 동갑내기 캐나디안 고물 수집가에게서 샀는데,아주 괴팍하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크레이그와는 아직도 친하게 지냅니다. 그 당시 몇 달 동안 음악에 굶주려 있다, 쿼드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넋을 잃고
밤을 새웠습니다. 정말 살아있는 듯한 소리, 마른 목을 부드럽게 적셔주는 샘물과 같은 소리,그런 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쿼드는 몇 달 뒤 알텍 "604-8H"에 자리를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팔려갑니다. 진동판 몇 곳이 방전으로 손상되어 볼륨을 마음 놓고 올릴 수 없었고, 파괴력 있거나 장중한 저음이 그리울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다른 스피커와 지내는 중에도 쿼드의 샘물과 같은 신선 명료함, 산들 바람과 같이 피부에 닿는 자연스러움은 문득문득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리움은 만남을 불러오는지...
그 쿼드가 지금 제 앞에 서 있습니다.
기대를 가득 안고 음악을 걸어봅니다. 지금껏 다른 스피커에 길들여진 레파토리를 얹고 들으니 저음의 부드러움과 양보된 표현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전에 쿼드로 잘 들었던 음악도 꺼내보고 아무튼 골고루 들어봅니다.
우선 "케니 드루"의 녹음을 얹어봅니다. 아 감동입니다! "도날드 버드"의 트럼펫 연주가 가상 현실로 눈앞에 전개됩니다. 이렇게 연주했었구나! 트럼펫의 마우스피스가 입술에 닿는 각도와 밀착도 변화가 연상되고, 입술에 침이 얼마나 발렸는지도 보입니다. 어떤 다른 스피커에서는 이런 부분이 절대 보일 것 같지 않습니다.
벨헬름 켐프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즉흥곡에서 중고역 타건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새벽 맑은 샘물에 번지는 동심원처럼 번져나옵니다. 소리 자체의 느낌만으로도 온 몸에 환희의 전류가 찌르륵 흐릅니다.
애띠었던 날 이선희의 녹음을 올려봅니다. 전에 듣던 이선희의 가창력 점수가 90점이라면 쿼드로 듣는 점수는 갑자기 120점으로 점프합니다.
"조르쥬 무스타키"의 곡을 들으니 파리의 거리와 공원에서나 남직한 냄새가 여러가지 섞여서 납니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다른 보컬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홀로그램처럼 피어오릅니다.
작곡의 음악성이니, 연주의 기량이니 등을 초월해서, 쿼드로 듣는 음악은 음 자체가 아름답고 살갑기만 합니다. 음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노라면 평소에 듣지 않던 곡까지 다 거치고 녹음이 다 지났음을 알리는 잡음에 이르곤 합니다.
기능에 관련된 부분을 완벽히 정비한 쿼드는 그전에 쓰던 쿼드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좌우의 차이가 없이 소리가 고르고, 소리의 양에 있어서는 불만이 없을 정도로 저음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최고이기를 기대한다면, 기대하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도도하거나 거만하거나 공격적인 표현, 집어 삼킬 듯 으르렁거리는 피아노의 낮은 음 타건, 한 뭉테기 튀어나오는 킥 드럼의 펀치, 베이스 연주에서 딱딱 끊기는 피치카토의 단호함이나 현을 때리듯 퉁길 때 나오는 통쾌함, 아랫도리가 풍만하게 가라앉아 떨리며 퍼지는 첼로 등을 기대하기란 무리입니다.
그러나 웬지 모를 듯 사실적이고 살갑게 와 닿는 소리, 온 종일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소리, 맑고 신선한 공기에 퍼지는 이른 아침의 새 소리와 실개울 소리가 아우러진 소리, 세련되고 깔끔한 맛과 향이라 비유될 듯한 소리, 갇히지 않아 막힘이 없고 살며시 떠올라 손짓하는 소리, 예쁘디 예쁘게 애간장 녹이며 미치게 하는 소리, 풀잎 끝 영롱한 물방울 냄새를 알리는 소리...
이러한 소리가 쿼드의 소리라면, 그 밖의 다른 것을 흠잡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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