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뚝섬 곰박씨





중학교 교복을 벗는 그해 겨울, 큰 잉어를 잡겠다며 범바위 밑의 얼음판 위에서 동태가 되기를 겁내지 않고 시작한 삼봉낚시에 대한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빈약해지고 있었다.

남이 쓰다 버린 얼음 구멍의 수면 아래 꿈쩍 않는 찌의 빨간 점을 응시하고, 때때로 부는 심술궂은 바람에 등을 돌리며 보내는 얼음판에서의 온 종일은 아무리 굳은 희망이라도 허물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미 녹기 시작한 얼음의 윗물, 다리 바로 아래에는 한 떼의 낚시배가 둥근 원을 그리고 떠다니며 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부지런히 낚아 올리고 있었다. 낚시를 접고 가까이 가보니 한번 걷어 올릴 때마다 두세 마리씩 마자와 누치를 잡아내어 물칸은 고기로 가득했는데, 그보다 더욱 눈을 끄는 것은 배 옆에 끌려다니는 두자 정도의 잉어였다. 얼어붙어 떨리던 내 몸과 마음에 뜨겁게 흥분된 기운이 샘솟듯 차올랐다. 나도 모르는 혼잣말이 나왔다.

"그래 저거야, 바로 저거, 저 낚시."



며칠을 연달아 그 자리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낚시채비와 배 다루는 법을 훔쳐 보았다. 삼봉낚시에 대해 허물어져 내리던 기대보다 몇 배나 힘차고 강한 기운이 마음을 채워나갔다. 며칠간 분주히 을지로에 나가서 낚시바늘을 만들 피아노 강선도 사고 추를 만들고 납도 모으고 해서는 손이 부르트도록 낚시바늘을 만들었다. 추도 비슷하게 만들어 낚시채비를 마련하고, 왼손을 허공에 흔들며 "마상이"라 불리는 작은 낚시배의 외노 다루는 연습을 상상으로 하며 보냈다.

"이제는 나도 낚을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범바위 근처 지금의 청담동 강가 김씨네 뱃집과 강 건너 북쪽의 연씨네 뱃집에서는 견지낚시용 배를 빌려주고 있었으나 정작 "챌낚"에 꼭 필요한 외노 마상이는 몇 채 없었고, 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망원경으로 살펴본바 챌낚꾼들이 가는 곳으로 가니 강변집이라는 뱃집이었는데, 대선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 아니고 직업 낚시꾼의 배를 맡아주거나 잡은 고기를 거간하는 집으로 보였다.

"챌낚배 좀 빌리려 하는데요." 하는 나의 요구에 청년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허접한 장비를 보고 한참이나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외노를 저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대선료 삼천 원을 받아 쥔 그는 내게 이물에 묶은 밧줄을 건네주었다.

외노 마상이를 다루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배를 돌려달라고 할까 봐 마음은 몹시 흔들리고 허둥허둥하였으나 태연한 척하며 매끈한 자세로 노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노를 잡은 왼손은 자신감 부족으로 벌써부터 떨리고 있었다. 이젠 뱃집으로 들어가 주면 좋으련만, 그는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 헛손질을 하며 삐뚤삐뚤하기는 했으나 계속하다 보니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나를 보고 있던 청년의 모습이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다.

보아둔 명당인 범바위 앞에서 낚시를 내리고 빙빙 돌며 챔질을 했다. 왼손이 여덟 번가량 젓는 박자에 맞춰, 견지채를 잡은 오른손으로 채비를 가지런히 가라앉히고 채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낚시줄의 끝에는 채비가 바닥에 끌리게 할 무게의 추가 붙어 있고 그 아래 손가락을 구부린 정도 크기의 날카로운 바늘이 한 자 반 정도 간격으로 연달아서 네 개 매달려 있다. 낚시배를 따라 바닥에 곧게 펼쳐진 낚시가 힘차게 채어질 때 고기의 몸 어디엔가 바늘이 꽂히도록 하는 "강도 낚시"가 챌낚이다. 미끼를 쓰지 않기 때문에 사도로서 혐오 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혐오는 무지와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라 확신한다.

한겨울 한적한 강상에서 온갖 풍경을 보고 일엽편주를 내키는 대로 저어 느끼는 자유,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군집한 큰 고기들을 찾아 헤매며 공상하는 맛, 매서운 날씨가 즐거운 노동에서 오는 열기로 편안하게 변하는 생존감, 다른 낚시로는 평생 못 잡을 큰 고기를 걸고 대하여 올리는 장렬한 맛, 고기가 밀집한 장소를 돌아 나오며 다른 낚시꾼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누는 대화의 호탕함, 남이 고안한 낚시 장비와 방법을 음미하고 내 것을 고치는 발견의 희열, 이러한 등속에서 챌낚을 능가할 낚시는 없기 때문이다.

"털컥"했다가 허전이 올라오는 낚시바늘 끝에 걸린 엄지손톱 보다 큰 비늘을 두 번 보는 것으로 첫날이 시작되었는데, 오후가 되자 심해진 바람은 배를 다루기 어렵게 했다. 뱃집에 빈손으로 돌아온 나를 본 청년은 그물로 잡아 놓은 잡어를 내 꿰미에 옮겨주며 위로하고는, 바람이 잘 때까지 따뜻한 내실에서 한기를 피하라고 했다.

틀에 엮은 드럼통 위에 널을 얹어서 지은 뱃집에는 방 두 개와 부엌, 작은 창고 등이 있었는데, 낚시꾼들이 몸을 녹이는 다다미 방은 동쪽 끝에 있어 삼면에 난 창으로 밖이 잘 보이고, 가운데 놓인 연탄 난로는 훈훈한 기운을 감돌게 했다.

"이리 따끈한 데서 몸 둠 녹이라우," "뭐이 둠 잡아서?"하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니, 낚시 도구 통을 옆에 펼치고 땅색 인조 곰털 외투에 곰털 모자를 쓴 칠십 줄의 노인이었다. 검정 뿔테 안경 너머 연륜에 늘어진 눈까풀이 흔들림 없이 빛나는 눈빛을 가리고 있었다. 거무스레 하관이 빠른 얼굴은 얇게 다문 입술, 반듯하게 높고 긴 코로 메워져 있어 감정을 읽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특히 코와 그 얹어리에는 굵게 얽은 자국이 오랜 세월 뒤편에 남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잡았어요."라고 대답하면서 내 꿰미의 고기는 뱃집 청년이 꿰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노인은 창 밖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내 장비를 보아주시겠다던 노인은 별 표정 없이, 이런 바늘로는 못 잡는다 하시며, 낚시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내게 물으신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낚시라는 대답을 들은 노인은 그제야 좀 웃으시며 "네 장가가기는 다 틀렸다." 하신다. 이 낚시를 맛 들이면 세상 모든 게 다 시시해져서 낚시만 하게 될 텐데, 장가 못 가도 좋겠냐고 다시 물으신다.

길이가 네 자, 높이와 폭이 각각 일곱 치 정도인 낚시 궤는 노인의 손때로 옻칠한 듯 보였다. 대략 여섯 틀 정도의 챌낚 견지채와 도구를 정리하도록 구획된 여러 층의 판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낚시바늘을 다듬고 담금질하는 작은 마치와 줄칼, 모루, 양초, 담금질할 물을 담을 작은 그릇, 주머니 칼, 집게, 송곳, 숫돌, 여러 가지의 목줄을 만들 섬유를 빼어 쓸 나일론 로프 토막, 바늘, 도래, 추, 낚시줄, 돌무 (돌에 걸린 낚시 빼내는 도구), 돌무 자새, 낙하산 줄, 이런 모든 것이 경륜을 말하며 단정히 정리된 가운데, 궤 뚜껑 중앙에는 풍어와 풍어 뒤의 액운을 막는 부적으로서 호랑이 발톱과 투명 플라스틱으로 성형한 호랑이 머리가 붙어져 있었다.

옷 꿰매는 바늘 끝 같이 다듬어진 나의 낚시바늘과는 달리, 노인이 보여준 바늘의 끝은 마치 창끝같이 납작한 가운데, 안쪽이 칼날같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험한 자갈밭에서 단련된 강 잉어의 단단한 비늘을 꿰뚫으려면 그래야만 하는데, 끝만 날카로운 나의 바늘은 두꺼운 비늘을 가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이어서 노인은 바늘 귀 만드는 법, 바늘이 돌지 않게 고르는 법, 날 세우는 법, 강하기는 하되 부러지지는 않도록 담금질하는 법, 목줄 매는 법, 목줄을 원줄에 매는 법, 위, 아래 원줄을 추에 연결하는 법, 줄 내리고 훌치는 법, 고기가 걸렸을 때 다루는 법을 차례로 가르쳐 주셨다. 마지막으로 너무 큰 고기는 영물이니 다 잡아 올렸더라도 웬만하면 다시 놓아주라고 하셨다. 노인의 낚시 궤에 붙은 부적도 마포에서 아주 큰 고기를 잡아서 비롯한 몸살과 다른 액운을 쫓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나중에 다른 사람의 입을 거쳐 알게 된 노인의 성은 박씨인데, 코와 주변의 얽은 자국으로 "곰보 박씨" 또는 줄여서 "곰박씨"라 불렸다.

대부분 다른 챌낚꾼들이 그랬듯 챌낚의 원조인 대동강 출신인 곰보 박씨 할아버지는 챌낚의 손꼽히는 명인이셨다. 직업적으로 몇 종류의 견지를 겸하는 다른 분들이 쓰는 낚시배보다 이물 쪽이 날렵하면서 고물이 들린 곰보 박씨의 배는 챌낚만을 위한 배였다. 최고급 홍송으로 여러 해 전 지어져 칙칙한 붉은빛이 도는 곰보 박씨의 마상이는 짙붉은 참죽나무 노가 가죽 고리에 매어져 있었다. 나일론 고리에 참나무 노가 걸린 다른 배에 비하면 품격도 품격이려니와 빠르면서도 물소리를 내지 않아 명인의 격에 맞는 최고의 챌낚 마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낚시배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선 되기도 했는데, 곰보 박씨의 배는 아무에게도 빌려져 지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타도 된다고 하였으나, 존경하는 노인의 애선에 손을 댈 생각을 감히 품기가 어려웠다.

노인이 본보기로 준 두 개의 바늘과 묶음을 본떠 만들고 다듬은 낚시채비로 두 마리의 커다란 잉어를 잡아 올릴 때의 벅찬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잡은 잉어와 새로이 본떠 만든 낚시채비를 보여 드리자, 노인께서는 당신이 만든 것 못지않게 잘 만들었노라 좋아하시며 격 없이 친구로 대해주셨다.

그로부터 삼 년간, 챌낚 철인 십일월에서 사월까지는 챌낚을 고대하는 조바심으로 일주일이 날아갔으며, 고기가 낚이든 안 낚이든, 날씨가 좋든 나쁘든, 고기를 낚는 만족감이나 노인의 가르침과 인생 역정을 듣는 기쁨으로 낚시가 가득 채워졌다.

대학에 입학한 여름, 봉천동으로 이사했다. 봉천동에서 뚝섬까지 가는 길이 멀기도 하고, 분방한 대학 생활의 최면에 빠져 챌낚을 가는 일이 몹시 뜸해졌다. 그래도 잠시 잠시 들여다보는 나의 마음에는 챌낚 가는 꿈과 노인의 안부에 대한 궁금함이 늘 있었다. 그러나 노인을 볼 기회는 다시 없었으며 전농동으로 이사하셨다고 전해 들었을 뿐,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도 몇 년이 흘러 한강에는 유람선이 떠다니게 되고, 한강에 새로 들어선 이익 집단에 성가시다는 이유로 챌낚꾼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쫓아내어 지게 되었다. 젊었던 날의 추억과 대동강의 향수를 되새기며 챌낚으로 마음을 달래던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 강에서 살고 강을 사랑하고 강에서 지기를 바라는 황혼의 인생을 강에서 쫓아내는 극악무도함을 무엇에 비하랴! 나의 마음은 그 노인들에 대한 측은함과 그리움으로 아파져왔으며, 무지함과 탐욕 뿐인 사회에 대한 분개가 험하게 끓어올랐다.

"늑대와 춤을"이라든가 "작은 거인"과 같은 영화를 볼 때마다 "저것은 나의 이야기다."라고 스스로 뇌까리곤 한다. 세월의 흐름에 밀려 보금자리와 사랑하는 것들을 어쩔 수 없이 잃고, 잊혀가는 인생, 이러한 인생 여정을 곰보 박씨 노인에게서 이미 보았으며 나 또한 그러한 인생으로 타향에서 사그라지고 있지 않은가?

눈물을 흘리며 부탁한다.
나의 강을 돌려다오. 나의 옛 친구들을 돌려다오.
나를 타향에서 잠들지 않게 해다오.

그러나 나의 눈물과 부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간 친구들을 생각하며



따스한 봄이 되고 나무엔 연록색 싹이 돋기 시작한다. 봄은 만물의 시작인가?

지역 신문에는 어느 때 보다도 많은 부고가 실린다. 만물의 움을 틔우려면 해묵은 옷은 같은 때 버려지는 것인가?

쓰다 나온 레코드를 수집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슬픈 소식을 알리는 부고가 한편으로는 뭔가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알리는 자명종이기도 하다.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수집품인 레코드가 주인을 잃고 자선 판매장에 기부되는 일이 흔해지고, 수집가들에겐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이민온 지 만 13년, 그 동안 사귄 친구도 많은데 벌써 3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중 미국인인 피터는 죽음이나 레코드 수집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오르는 친구다. 우리 어머니와 같은 해에 태어난 피터는 턴테이블 수리를 알아보려 가게에 들른 손님이었다.

며칠 뒤 다시 들른 그와 한담을 나누게 되었고, 우연히 코소보 사태에 대해 서로 말하게 되었다. 그는 코소보에 미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이었고, 나의 주장은 외부 개입은 자연적인 균형을 오히려 방해하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담은 점차 토론의 형태로 발전했고, 피터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 한국에게 도움을 준 미국이 고맙지 않는가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한국전쟁의 발단은 분단이고, 분단에는 미국도 50% 이상의 책임이 있는바 고맙기는 커녕 원망스러울 뿐이며,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 부터가 미국인으로서의 우월감과 편향된 역사 지식에 의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리고는,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 당시에 생겼던 일들을 객관적 시각에서 보지 않는 무지한 미국인과는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쫓아냈다.

며칠 뒤, 가게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 민 피터가 크게 외쳤다. "나는 한국 놈이 싫다." 나도 외쳤다. "나도 미국 놈이 싫다." "너의 가게에 들어가도 되냐?" "왜?" "이야기하고 싶다." "공부나 반성은 좀 했냐?" "그런지는 이야기해보면 알 것 아니냐?" "그럼 들어와라."

그와 나 사이에 코소보나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다시 없었다.

그는 35년간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 여객기 조종사와 관리자로서 일하다 부사장의 직위에서 은퇴한 베테랑이었다. 고등학교때 수학 경시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던 그는, 집안 전통을 따라 의사가 되고자 16세의 나이에 의대 장학생으로 조기 입학한 적도 있으나, 당신의 꿈을 대신 이루도록 조종 교습을 몰래 지원한 할아버지 덕으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고 의대를 뛰쳐 나왔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크게 실망했으며, 훗날 국제선 여객기의 기장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와는 서로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조종사로서의 성장은 제트 여객기의 발달 및 세계사의 격동과 동조되어, 직업인으로서는 남다른 기회를 누렸다. 월남전 당시에는 공군 장교로서 조종 교관이기도 했으며, 비아프라 사태가 있었을 때 아프리카에서 조종사로 일하기도 했고, 이란 왕정의 파국에서는 팔레비 이란 국왕을 프랑스로 도피시키는 비행을 맡는 등 그야말로 화려하고 극적인 인생을 겪었다.

그와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동안, 그가 미네소타 방송국에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적이 있는 음악 애호가이며, 직업 사진사로도 잠시 일한 적이 있고, 자동차, 원예, 목공, 요리에도 깊은 식견과 능력을 갖춘 교양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후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일터에 들르는 그는 나에게 좋은 친구요, 스승이요, 조원자가 되었다. 나로서는 그의 경험담을 듣노라면 그 흥미로움에 시간가는 줄 몰랐으며, 그로서는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흔한 욕심과 힘에 아랑곳 없이 당당하고 솔직한 나의 태도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남겨진 인생이 암에 의해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행기 사고로 앞서 간 아내 뒤에 남겨진 그는 미국의 대도시에서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두 아들과 떨어져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인 밴쿠버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니, 정리라기보다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의 생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은 작별의 순간을 맞기에는 너무도 절절했으며, 진통제가 가져오는 혼미함과 싸우는 그의 투명한 인식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반추하여 영원히 새기고자 발버둥쳤다.

그의 집착은 생명 뿐 아니라 금전에 대해서도 남달랐는데, 쌍발 자가용 비행기와 여러 부동산을 소유할 만큼 재력이 있었는데도, 스스로 먹는 치료약의 가격에 질리기도 하고, 고양이 밥의 가격을 판매점 별로 몇 전 차이가 나는지까지 기억할 정도로 이재에 집착을 하곤 했다. 그러한 그를 스크루우지라고 흉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내게, 그는 구두쇠 기질로 유명한 스코클랜드인의 후예이며 집안 내력에 그런 피가 흘러서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6000장이 넘는 레코드가 있었는데 각 레코드 보호지에는 언제 누구와 들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요약이 되어 있었다.

삶의 흔적이 진하게 담긴 레코드와 헤어지는 것이 몹시도 쓰라렸던 그는 모든 레코드를 고스란히 나에게 물려주고자 유산 집행인에게 유언을 하였고, 잘 아껴달라고 내게 당부했다. 그러나 피터와의 생에서 관계가 평탄하지 않았던 유산 집행인은 피터의 유언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다.

나의 사고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을 가족 밖에서 순서대로 꼽는다면 피터가 두번째이다. 그가 가식없이 우정을 담아 베푼 경험담과 생각은 나의 인식에서 새롭게 진화되었으며 나를 이끄는 커다란 부분이 되었다. 여러 친구들에게서 받아들인 그러한 쪼가리들이 많아지고 새로이 얽히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 둘 이 세상에서 사라져갈 것이며, 나의 쪼가리들 또한 어디에선가 흘러 다니는 가운데 나 역시 다른 곳으로 천천히 사라질 것이다.

앞서간 친구들의 명복과 재회를 기원한다.

낙엽이 지는 즈음



그때,
낙엽이 지는 즈음,
멀리 있는 사랑의 그리움과 답답함에 가슴이 저렸다.

그때,
낙엽이 지는 즈음,
떠난 사랑 뒤 아쉬움과 쓸쓸함에 가슴이 저렸다.

그때,
낙엽이 지는 즈음,
사랑이 떠나게 한 미안함과 자책으로 가슴이 저렸다.

이제,
지는 낙엽을 보니,
사랑을 보낼 젊음 마저 떠난 것에 가슴이 더욱 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