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hrodite's Child"의 멤버로 잘 알려진 데미스 루소스의 노래는 뱃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절묘한 비브라토가 번져나가는 환상적인 느낌이 일품이다. 그러나, 그것 보다는 그리스 전통 음악의 감성, 선율, 박자가 뼈에 사무치도록 박혀있다는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나로서 한국의 대중 음악가 중 김수철을 높이 사는 이유에는 그가 전통 창법과 가락을 심지에 두고 노래를 시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뿌리를 노래 깊이 간직한 음악가는 데미스 루소스 말고도 무스꾸리와 무스타키를 예로 들 수 있다. 비록 무스타키는 후에 모로코를 경유해 프랑스에 귀화한 유대인이기는 해도. 우리나라에도 우리 전통 음악의 정서와 음악적 느낌을 전 세계에 공감시킬 수 있는 음악가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오스카 피터슨은 캐나다의 대표적인 재즈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자서전을 요즘 읽고 있는데,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하여 국철 객실 승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약 보름씩 집을 비워야 했음에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자식들에게 맡긴 음악 과제와 학업 진도를 세세하고 엄격히 검사하였으며 사려깊은 가장의 본보기를 지킨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며, 거기에 부모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고 반성한다. 연주에서 보이는 속도, 소절과 소절에서 화음의 이해와 창의적 구사, 정교함 등으로서 당할 연주가가 없는 명인이지만, 소울이 부족하다든지, 블루스는 잘 연주하지 않는다든지, 흔한 곡을 너무 많이 연주했다든지 하는 비평을 들었다. 그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의 매끄럽고 화음과 기지 넘치는 연주를 듣는 즐거움은 비할 데 없으며, 두 장이 들어간 그의 판을 1불에 산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Aqualung이 "Jethro Tull"의 독자적 개성이 듬뿍 담긴 성공작이라면 "This Was"는 그들의 역량과 실험 정신을 만끽할 수 있는 음반이다. 블루스와 재즈를 락에 접목하여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음악을 듣는 동안 거부감 없이 여러 장르를 오가며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소리와 느낌의 제시가 환상적이고 화려하여 환각적 동반 상태를 느낀다. Aqualung 보다 좋은 녹음이라고 나름 평한다.

크로이처와 봄의 두 소나타가 모두 들어가 있는데다, 헨릭 쉐링이 연주한 판이라 무조건 집었다. 감정과 균형의 질서를 잃지 않는 쉐링의 연주가 일품인 반면, 루빈시타인의 감정적이고 기교파적인 해석이 그와 조화가 잘 되지 않는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서로의 대화와 싱코페이션이 끈적끈적,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아름다움은 메뉴힌과 켐프의 DG 녹음을 따를 수 없다. 베토벤의 피아노 만큼은 유대인 연주가의 것을 그리 좋아한 적이 없다. 유대인의 연주에서 종종 보이는 달콤하고 다소 감정적이며 기교가 돋보이는 연주는 베토벤의 단단한 구성과 고상한 심상 표현에는 적합치 않다고 느낀 경험이 많다. 일종의 선입관일까?

나는 쇼팽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쇼팽에게 여성 팬이 많은 것에 대한 반작용과 남성적인 것을 숭상하고 과시하는 스스로의 아집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폴로네에즈와 마주르카는 너무나 좋다. 그런 경험을 실제 해 본 적은 없으나, 폴란드의 시골에서 비가 막 그친 뒤 창문을 열고 밖의 전원을 보는 느낌이랄지, 아름답고 사색적이며 몽환적이기도 하고 풋풋하고 달콤한 향내가 관능적으로 번진다.

"하늘의 소리가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혼의 소리다."라고 말함으로써 혼의 소리가 주는 느낌을 정의하련다. 자주 듣지는 않아도, 소리만으로도 좋아하는 것이 혼 소리다. 그 중에서도 데니스 브레인의 혼 소리는 그의 순수함밖에 없는 연주에 더욱 힘입어, 비할 데 없이 정결하고 고아하다. 대를 이어 혼을 연주한 집안 출신의 천재 연주가가 요절하여 녹음이 매우 귀하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