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일 토요일

오늘 선택한 음반


현재 영국의 북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포함하는 지역 원주민인 켈트족의 민속 음악을 프랑스의 사 인조 "An Trikell"이 편곡하여 켈트 어로 노래하거나 연주한다. 1967년 출판. 회고적이고 순수한 느낌으로 마음을 정화해주는 힘이 있다. 고된 하루를 보낸 상태라면 불편한 마음을 부드럽고 차분하게 달래는데 이 음악이면 될 것 같다. 우리 정서의 "한"에 해당하는 듯한 느낌도 있어서 매우 드물게 접하는 음악인데도 느낌은 그리 멀지 않다.



유씨 비욜링이 작고하기 1년 전인 1959년에 출판된 판이다. 수많은 잡음이 있음에도, 한번 듣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음성에다 절묘한 감정 표현과 통제가 더해진다. 다른 사람의 같은 노래보다 훨씬 많은 느낌을 경험하게 해준다.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가 시시각각 섬세하고, 그 섬세한 변화가 팽팽하고 질긴 줄을 따라 소리에 연결된 것 같다. 청취자로서 전율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 노래에 실린 감정의 주체인 듯 숨이 멈추거나 울컥하고 치밀어오름을 느낀다. 그가 표현하는 감정의 세밀함을 따라가다 보면, 파바로티나 델 모나코의 표현은 너무 즉각적이고 촌스럽거나 공연한 허세가 있는 듯 느껴진다.



이 판을 듣기 전에는 소리의 배치와 지휘에서 앙드레 프레빈 지휘의 런던 심포니 연주 음반을 좋아했는데, 이 음반의 녹음과 효과가 압도적으로 좋다 보니 프레빈의 녹음이 밀려났다. 입체적이고 세밀하고 규모 있으면서도 각 악기의 개성과 표현이 살아난다. 상대적으로 1972년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총화를 이루는 오케스트레이션에 치중한 나머지, 주제와 연결된 악기의 개성이 살아나지 못하고 러시아 특유의 과장된 맛과 무대와의 시각적 연결이 함께 떨어진다.



얼마 전에 이 음반에 있는 "너저리 튠의 변주곡"을 듣고 새로운 경험을 했다. 마치 수십 곡을 한 곡에 모아놓은 듯한 수많은 느낌과 장면이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며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오늘 그 경험을 다시 살려보고자 선택했다. 바그너로 시작해서 모차르트, 차이콥스키, 브람스로 헷갈리게 느낌이 바뀌어 나가는데다, 영화를 보듯 시각적인 효과도 무쌍하게 바뀌고 순간순간 어리벙벙해진다. 상당히 특이한 작품인데, 소리의 순도와 다이내믹함을 보면 1959년에도 이미 상당한 녹음 기술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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