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2일 일요일
할머니
오늘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꼭 44년이 되는 날이다.
다 낫지 않은 감기와 바깥 일의 피곤함도 하나 내색지 않고
아내는 할머니의 제사상을 차렸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도, 한 번도 빠짐없이 조부모와 아버지의
제사를 소홀함 없이 모시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내 마음을
떠난 적이 없다.
나에게 인간으로서의 훌륭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부터 온 배움의 덕이 가장 클 것이다.
"아이구 내 새끼!"가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 전부로 기억에
남듯이, 할머니께서는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의 할머니의 모습과 행동은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사상 뒤에 모셔진 사진의 할머니 모습은 살아계신 동안의
한결같은 모습 그대로 이시다. 해도 뜨기 훨씬 전 부뚜막의 불들을
다 들여다보시고 부엌 일들과 몸을 씻는 일을 마치신 후에는
참빗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하시며 터럭 하나라도 흐트러질까
밀랍을 매겨 쪽을 지신 그 모습은 밤에 자리에 드실 때까지
변함이 없었듯 오늘도 그대로 사진 속에 살아계신다.
끼니 사이에 잠시 들일을 다녀오시는 중에는 두렁과 길옆의
나물과 나무의 새순 등을 한 줌씩 뜯으셨고, 논 옆에 난
작은 수로의 수초에 바구니를 밀어 넣어 톡톡 튀는 새우를
한 끼에 넉넉할 만큼 잡아서는 텃밭의 채소와 아울러 순식간에
더없이 맛있는 상을 차려주셨다. 신기한 것은, 매 끼니가 끝난
밥상엔 남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아무도 음식의 부족을
탓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남는 반찬이 없으므로 다음번
밥상 역시 늘 새롭고 신선한 반찬으로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께서 담그신 술과 식초는 동리에서 최고로 손꼽혔는데,
술을 좋아하기도 하셨던 할머니께서 고단함을 달래시는 술을
한 종지 드실 때에는 나에게도 간장종지 바닥을 살짝 덮을
만큼 나누어 주셨고, 찌꺼기로 남은 술은 부뚜막 옆
식초단지에도 늘 조금씩 넣어주셔서 식초 씨의 숨이 죽지 않고
잘 살아서 좋은 식초 맛을 잃지 않게 하셨다. 식초가 상한 다른
집에서는 늘 식초의 씨를 얻어 갔지만, 어느 집에서도
할머니의 식초보다 맛있는 것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혹시 어딘가 묻어서 남은 밥알은 하나라도 보이면 풀 주머니에
모으셔서 할아버지의 근엄한 의복에 먹이는 풀로 쓰셨다.
뿌연 뜨물이나 설거지 물은 절대로 그냥 버리시는
일이 없었는데, 뜨물은 요리에 설거지 물은
부추 등이 심어진 텃밭에 뿌려서 거름으로 쓰임이 있게 하셨다.
덥거나 뜨거운 물은 꼭 식은 다음에 버리셨는데, 땅이나
도랑에 사는 미물을 상하게 하는 것은 큰 죄라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께서 이런 믿음은 물론 현명한 생활과 습관을
어떻게 배우고 익히셨는지까지는 들을 기회가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학교에서 배울 기회가 전혀 없으셨으며,
달리 종교라고 할만한 것을 믿지도 않으셨다. 아마도
할머니의 모습이 내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듯 할머니의
할머니께서 그러하셨으리라.
내가 거의 맹목적으로 한국적인 것에 대해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데는 할머니의 음식 맛과 할머니의
사시는 모습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나의 한가운데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을 장만하기에 비용과 수고가 더욱 많이 드는
외국 생활임에도 우리 집의 저녁 밥상은 거의 순 한식이다.
나에게 있어 할머니의 맛이란 내 것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잃지
않게 하는 끈이 되듯, 같은 일이 우리의 아들들에게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다하지 않는 아내의 배려이다.
오늘도 끝난 제사상 머리에 앉아 아들은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다. 아들은 맛있는 여러 가지의 전통 음식과 지나간
가족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제사를 좋아한다.
결혼을 할 때에는 제사에 담긴 가족 사랑을 이해하고,
그래서 제사지내는 우리의 전통을 존중하며 꼭 지킬
여자를 가려 택하겠다 한다.
아들의 모습을 보는 아내의 얼굴에 제사를 받드는 보람이
활짝 핀다.
제사의 참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고 행하여 지키는 가정이 늘어나서
아들의 세대에서도 제사가 낯설거나 희귀한 풍습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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