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일 일요일

실향



내가 태어나기 몇 해 전부터 우리 집은 뚝섬의 새촌이라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께선 전쟁에서 입은 사회적 상처 때문에 대졸 학력임에도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가계 부담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행당동에 있는 학교로 발령나셨고, 그래서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뚝섬으로 집을 정하시게 되었다.

새촌의 남쪽으로 탐스런 오이가 가득 달린 밭 옆 길을 따라가면, 이따금 서리하러 가기도 한 딸기밭과 원예원을 지나고, 새촌 서쪽 건너의 경마장 사이를 돌아온 큰길을 만난다. 그 길가에는 수창상회라는 오래된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맛볼 수 있는 빙과와 사탕은 강으로 바람쐬러 가는 길을 재촉하는 꼬드김이 되었다.

장마 때마다 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아주는 수문은 둑을 질러 굴 같이 나 있었는데, 강바람이 선선히 드는 그늘진 통로는 한낮의 더위를 피한 노인들과 살찐 아주머니들의 단골 쉼터였다. 나는 굴보다는 둑을 넘어 강으로 가기를 좋아했는데, 푸르고 짧은 풀이 빽빽이 덮인 둑에서 풀을 뜯는 염소를 놀리는 재미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염소는 순해서 만져도 크게 거스르지 않지만 때로는 머리를 앞세우며 달려드는데, 그런 염소를 피하며 골난 모습을 보는 짓궂음 다음에는 까닭 모를 홀가분함이 가슴을 채웠다.

강둑의 중간 턱에 잇대어 늘어선 작은 판잣집들은 별 재산 없이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는데, 둑의 중간 높이에 난 길을 마당 삼아 노는 어린 아이들과 집안일을 꾸려가는 그곳 사람들에게선 끈끈한 내음과 사투리 섞인 목소리가 느껴졌다. 내 또래 아이의 손을 따라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지붕 밑 납작한 방은 한 부분의 투명한 플라스틱 골판에서 들어온 햇빛으로 밝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강가에 제법 굵은 돌들이 널린 곳은 쪼그려 앉아 방망이질하며 빨래하는 아주머니들의 차지였고, 따라나온 아이들은 그 바로 윗물의 자갈밭에서 다슬기를 잡거나 서로 물을 끼얹고 도망가는 물놀이를 했다. 그보다 좀 더 떨어진 자갈밭에는 틀을 열 개씩이나 펼친
방울 낚시꾼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키 높이 되는 대나무 손잡이의 쏠채로 떡밥 덩이를 보이지 않을 만치 멀리 던지는 힘찬 모습은 호기심 가득한 나의 눈을 한참씩 잡아 놓곤 했다.

드물지만, 장마로 불었던 물이 내려앉은 자갈밭에는 연고자가 나서지 않은 익사 시신이 있기도 했는데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검게 부푼 손발과 푸석하게 엉킨 머리카락을 보면 무서움과 동시에 가려진 얼굴과 사지도 마저 보고 싶은 묘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보다 윗물로 가서 유원지 아래엔 장어구이 집이 여럿 있었는데, 얼굴이 기름지고 살집 있는 아저씨들이 검은 코로나를 타고 와서 불그레한 얼굴로 한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양념을 거듭 발라가며 숯불 화로에 장어를 굽는 냄새는 지날 때마다 침이 나오게 하며 배고픔을 더해 주었다.

장어구이 집과 유원지 사이에는 강 건너 범바위에 내려 건너 봉은사나 압구정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짐을 내리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 소 마차 짐을 가득 실은 배가 가라앉지 않고 뜰 때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범바위에서부터 논밭 곁으로 난 길을 가면 봉은사가 나오는데, 휴일이면 돗자리에 올린 앉은뱅이 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절밥을 맛보는 가족 나들이로 절 입구의 나무 그늘이 채워지곤 했다.

유원지의 높고 큰 나무 그늘 여기저기엔 한두 무리의 노인들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둥글게 모여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와 춤으로 흥을 태우곤 했는데, 새하얗게 탈색한 모시옷을 입은 노신사가 취기로 붉은 얼굴에 비장한 기가 감돌도록 춤사위를 잡으면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오곤 했다. 다른 한쪽 구석에선 한여름에도 검은 긴 소매를 입은 장발의 젊은 두 청년이 기타를 두드리며 서양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장난으로 구걸하는 모습도 보였고, 높은 그네에 올라 힘찬 지름으로 높이 가르며 뽑내 즐기는 남녀노소의 펄럭이는 옷자락도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그중에서도 공기총을 나무 위로 겨누어 잡은 몇십 마리의 참새를 꿰미에 엮어 자랑스럽게 허리춤에 매단 아저씨들은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세월이 흘러간 언젠가 유원지 위로 강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였는데, 그 이후로 유원지는 모습을 빠르게 잃어갔으며 건너편에 보이던 범바위도 다리 밑으로 찌부러져 이전의 신성한 모습을 잃었다. 강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갔으며, 그나마 오는 사람들도
먼 곳에서 어쩌다 오는 사람들로 서로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기 시작했다.

우리 집도 강 건너 아래의 논현동으로 이사했는데, 낚시에 맛이 들은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간 탄천과 만난 상류의 잠실 여울에서 견지낚시와 루어낚시를 해서 쏘가리, 끄리, 모래무지, 마자, 누치 등의 강고기를 한껏 잡곤 했다. 그때까지도 제방 너머 밭에서 서리한 애호박과 강고기로 갓 끓인 천렵 국을 지나가는 어린 낚시꾼에게 권한다든가, 모자란 낚시 도구를 빌려주는 등의 강변 인심은 여전했다.

어느 틈엔가 잠실교에 이어 포장된 대로로 갈라진 막힌 물길은 쓰레기로 메워지기 시작했으며 호박밭은 밀려나고 아파트라 불리는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린 낚시꾼에게 옆의 물골을 양보하여 살펴주던 인자함도, 남이 낚시하는 아랫물에 말없이 들어가지 않는 예의도, 지나가는 낚시꾼에게 천렵 국을 권하던 다정함도, "무엇무엇 했습죠"하고 말하던 강가 토박이의 수줍은 사투리도 사라져갔다. 강물이 내음과 빛을 잃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이다.

좀 더 나이가 들면서 먼 상류의 덕소, 팔당, 양수리, 양평, 여주 등의 강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도 더 어렸을 때 마음에 담긴 강의 모습을 되찾아 보려 한 순례의 행로였으리라. 황산에서 팔당으로 걸어가던 중 경안천 다리 위에서 보는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커다란 고기의 천연덕스런 무리와 그들을 또렷이 보여주던 맑은 물, 도곡리 앞 검은 바위틈에서 미끼를 따라 불쑥 튀어나온 꺽지, 자신의 견지가 더 잘 잡힐 테니 써보라고 빌려주신 모르는 아저씨의 너그러움, 그 낚시를 여울에서 물고 나온 큰 누치, 양수리 합수 머리의 넓고 하얀 자갈밭과 힘찬 바디끄리의 유영, 여주의 그윽하고 시적인 모래여울.....이런 것들이 어린 날의 정감과 풍경을 살려주거나 새로움 감동을 주기도 했지만 이내 그들도 인간의 욕심이 만든 세월에 하나 둘 사라져갔다.

남아있는 정경과 인정이 없다면 그 자리로 되돌아가보는 것이 실망 이상 무엇을 되돌려 줄 수가 있을까? 나의 실향은 돌이킬 수 없는 슬픈 아픔이다. 단지 장소를 떠난 아픔이 아니라 시간의 저쪽에 모든 것이 묻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영원히 남기를 바랐고, 그들의 빛이 바랠 때마다 한없는 아픔이 가슴을 도려냈다.

이제 그 강가는 시멘트 조경으로 바뀌고 바퀴 달린 장난감을 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내겐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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