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보이는 그릇은 술을 담든, 차를 담든 늘 쓸모가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예전엔 술을 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차를 주로 담습니다. 두 가지를 다 마셔보기도 하고, 어느 하나도 없이 오래 지내기도 해보니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가려집니다.
정치든 종교든, 저가 선택한 특정 방향은 없습니다. 단지, 거짓과 불공평 그리고 그것들의 도구인 폭력이 싫을 뿐입니다. 비 폭력은 제가 바라는 것을 찾는데는 절대 명제이지만, 저와 주변에 작용하는 폭력에 대해서까지 비 폭력으로 저항하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여하한 형태의 무저항이므로 거짓과 불공평을 세우려는 폭력에는 형태를 불문한 저항을 할 것입니다.
고상한 방법의 고마움을 알 만큼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짓과 불공평을 숨기고 치장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장이를 군자로 예우하면, 그들이 군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거짓말장이를 고상하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으로 황금이나 힘을 얻은 자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의 페어 플레이는 얻은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일 뿐인데, 다른 것으로 페어 플레이를 대신하겠다는 것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짓입니다. 거짓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은 천지 만물의 이치와 전혀 맞지 않는 일이고, 이 꽃에 속아 넘어가느니 오로지 그릇된 인간의 얄팍한 탐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에 기대어 일어나고 거짓되기를 고집하는 집단을 혐오할 뿐입니다.
일본의 동근동조 운운은 진심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약탈에 합리성을 넣으려는 말뿐인 거짓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피가 섞였더라도 나의 것을 가로채려는 자를 누가 형제로 여기겠습니까? 욕심이라는 휘발유를 먹고 굴러가는 능력이 남에게 좋은 일을 할 까닭이 없는바, 누가 그 능력을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와 출발이 같은 형제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잘 살고 인자하다면 그 형제를 본받아 같은 모습이 되고 한 마을에서 늘 서로 기대어 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漢족은 자신들이 힘세고 대우받아야하는 사람들로서만 늘 생각하고 있으니 주변과 동격의 형제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타이권의 종족 끼리는 그런 종류의 장벽은 없으므로 우리가 인자하며 본받고 싶은 형제의 모습이 될 때, 그들 사는 곳의 어디에 가더라도 환영받고 우리 말을 쓸 수 있으니, 국경과는 상관 없이 우리가 누리는 영역은 넓고 자유로와질 것입니다.
원론에서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거짓이 지배하고, 거짓에 참여하도록 탐욕이 부추겨지고, 그 탐욕에 의한 힘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되었을 때, 존경과 선망을 받으며 세상을 이끌어 갈 이상적이고 인자한 형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일관성 있는 역사의 궤도에서 흘러가며, 우리는 그 궤도를 보고 운명의 방향을 선택해야 합니다. 탐욕과 거짓의 운전대로 각성과 현실의 궤도를 주행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