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0일 일요일

남쪽 나들이

샌프란시스코

잠시 쉬다 간 "Point Isabel" 개 산책 공원에는 따뜻한 봄기운이... 

"Fishermen's Wharf"로 내려가는 길

저 엉뚱한 덤불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걸인이 행인을 놀래킵니다.  

빵 빚는 광경을 보는 행인들

하늘은 푸르고...

샌프란시스코 시청의 카펫


길로이 - 몬터레이

봄기운 가득한 Gilroy의 구릉

몬터레이로 접어드는 일대는 녹음이 우거지고...

다른 곳에 비해 덜 건조하여 푸르름이 더하고...

사구 너머로 보이는 지평선 

모래밭을 때리고 흩날리는 파도

한 무리의 새

수 많은 놀잇배

철 이른 1월의 수영복 

전혀 겨울같지 않은 해변과 나무들


몬터레이 - 모로베이

여기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풍경

101 하이웨이를 따라 수 천 리 절경  


고래의 물 뿜기와 몸짓을 보는 여행자들 

석양

하루 해의 마지막

고운 빛

노을과 바다

잠을 청하는 거대한 코끼리 물개


모로베이

달과 별

동트기 전 모로베이 선창

아직 문이 닫힌 낚시 점

새벽잠을 설치고 방황하는 나그네들

모래 섬 너머로 보이는 모로베이의 언덕

유명한 모로 바위를 오르는 것은 불법


산루이스오비스포

피어로 발길을...

세상 걱정 없는 물개

물개와 놀려고 나들이 한 카약커들 

알아서 잘 어울립니다.

검은 유리에 반사된 우리들 

뭐 먹을 건 없니?

아 졸려...

우리네는 평생 놀고 먹기...

바람같이 달리는 자전거

맑게 펼쳐진 시원한 하늘

2011년 1월 22일 토요일

무엇을 낚을 것인가?



 : 고기를 포획하는 원초적 만족감을 낚음. - 채취의 단계

樂 : 낚시에서 오는 오감의 쾌락을 낚음. - 기예의 단계

 : 자연과 나-조화적 아름다움의 인식을 낚음. - 심미의 단계

 : 낚시를 통해 삶의 길을 비추고 닦는 자신을 낚음.
      하여, 깨닫는 바 그대로 낚고, 그대로 삶.  - 각성의 단계

2011년 1월 20일 목요일

악법과 한국 사회



세계 신기록을 세울 수 있을 만큼 악법이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

한국 헌법은 악법이 나오지 않게 하거나 악법을 고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망가져 있다는 것,

망가진 헌법과 악법 대부분이 과거 독재 정권들의 정권욕과 물욕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

대다수 국민은 악법의 2차, 3차적 피해자이나, 외형적으로는 악법의
혜택을 받는 권력과 금력에 예속되어 자신들도 악법 수혜자인 것으로
착각하거나 악법 피해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

결과적으로 한국은 악법에 따라 굴러가는 기형적 시스템으로
굳어졌다는 것,

그 기형적 시스템은 판단력이 부족한 국민에게 사회의식 또는
사회적 정의감의 혼미를 가져온다는 것,

이제는 국민 의식이 거듭나서 잘못된 틀을 고쳐야 할 때!

만주와 우리 미래



I-

한 지역과 주민의 국가 성립이나 귀속에 관한 문제는 국가 성립의 상위 정당성이 통치권에 있는가, 지역 점유권에 있는가, 아니면 지역 점유 주민의 독자적 성향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현재의 중국만 해도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는 한족을 중심으로 약 55 갈래의 민족을 연합(다른 의미로는 억압)하여 유지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합집산을 수없이 반복하여 왔습니다. 제국으로서의 통치권이 한족 이외의 몽골족이나 만주족에게 귀속되었던 때도 있으나, 19세기까지 각 지역의 점유는 대체로 토착 민족이 대를 이어 각자의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현재의 통치권을 중심으로 국가 영토의 역사적 실체와 정통성을 본다면 역사의식의 일관성이란 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통치권은 늘 바뀌어 왔기 때문입니다. 만주의 어느 지역에 중국의 역사적 권리가 있다고 말할 때, 같은 권리가 한국, 몽골, 러시아 등에게도 공히 성립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뿐만 아닙니다. 현대 중국은 통치권 면에서 과거의 어느 왕조를 계승하고 있지도 않으므로, 역사의 계승을 요구할만한 아무런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중국을 거론하여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논하는 것은 논리의 근거를 이미 상실한 셈이 됩니다.

인간 개개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인본적 개념을 앞세운다면, 지역 주민 대다수가 원하여 독자적 사회 및 정치 체제에 의해 살기를 희망하고, 그 규모와 능력이 국가 성립의 단위가 될 수 있다면 이미 그 지역은 별개의 국가로서 존립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이 통일되고 만주 지역의 주민 대다수가 한국의 국민으로 되기를 원한다면 언젠간 만주가 다시 한반도와 정치적으로 한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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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말갈족의 후예인 나나이족의 말과 한국말의 근친성은 표준말과 제주 방언의 근친성 이상일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연합에 의한 국가 창설이 도모되었을 때, 언어와 정서면에서 근친 관계에 있는 거란, 말갈 등은 함께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형제로 간주될 수 있었지만, 언어와 정서등 여러면에서 우리와 매우 다른 중국은 결국 남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알타이권 어느 민족의 언어, 음악, 생활습속을 보더라도 중국어권에 속하는 어느것보다 가깝게 느껴지고 쉽게 정을 줄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고대 돌궐족과 연관된 카자흐, 위그르, 튜바, 알타이의 음악을 검색하여 들어보십시오. 어떤 음악은 가사만 바꾸면 한국음악으로 그냥 둔갑할 정도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컨데, 한문이 컴퓨터 용의 언어로 쓰이기에 어려움을 겪고있으며 한류가 각광을 받고 있는 이 싯점에서 한글판 소프트웨어 등을 알타이 문화권과 만주 지역에 특혜 제공하는 등등 문화로서 이들을 계속 엮어나가는 방향을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만주를 우리 울타리안에 넣는 백년대계 중의 하나가 될것입니다.

민족 개념, 자유와 지성



민족 개념의 시작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해서 편리하며 스스로 원하는 고유의 삶의 방식을
함께 나누고, 함께 즐기고, 함께 지키고, 하여 모두 자유인
으로서의 삶을 공유하기 좋기에 서로를 "같은 종류로서
가까이 연결된 사람"이라 인식할 수 있는 집단, 이것이
민족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매 순간 나와 우리의 고유함을 마음껏 누리는 자유인
으로서 살고자 했는데, 민족이란 의미가 제게 남다른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따금 민족주의를 전체주의의 시작으로서 오도하려는
주장을 접하고는 아연해질 때가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잘 발달하였다고 인정받는 나라에서는
개인주의냐 전체주의냐 하는 양분법 사고를 보기 어려운데,
정당성, 합리성, 거시적 관점(정당성,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있다면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당성, 합리성이 없이 당장 욕구에 급급하다 보면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공리에서 벗어나며, 특정 집단의
이익에 맞춰 전체가 움직이도록 독재를 하자면 개인의
희생이 당연한 것처럼 꾸밉니다.

독재자가 주장하는 전체성이나, 사회 정의와 귀결을
무시한 개인주의의 근본 원인이 그리 흡사한바,
개인과 사회의 정당성, 합리성, 장기적 시야가 모두
성숙하면 개인과 전체로서의 갈등이 없어질 것입니다.

민족주의를 전체주의와 혼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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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및 생활 공동체로서 민족의식을 갖고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은 
배타적 집단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일입니다.

우리는 민족의식을 오용하여 남을 침탈한 적도 없습니다.

조선 시대 이래의 현실을 보면 우리에게 민족적 자각이 부족하거나
왜곡되어서 문제가 되었으면 되었지, 민족의식이 넘쳐서 문제가
된 적이 한시라도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로서는 저지른 적도 없고 실제 발생한 적도 없는 
부정적인 것들을 들어 민족의식을 폄홰하는 한국의 현상은 
언론과 교회에 의한 대중 세뇌의 결과일 것이라 봅니다.

한국 교회와 언론 독점 세력의 뿌리가 무엇이며 그들이 노리는 
결과가 무엇이기에 그러한지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민족의식이 장애가 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를 노예처럼 쓰고자 하는 안팎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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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정의감을 희생하면 잘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장 차는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즉 완장 차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한 심리가 대세인 듯 된다면
이는 사회 체제가 정상이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즐기거나 실용할 생각이 없는 공부를 하느라 어린 시기를
자유와 기쁨 없이 지내고, 큰 회사에 취직해서 가정생활과 자기 발전의
기회가 빈약한 생활을 하다가, 자국의 교육 시스템이 만족스럽지
못해 사교육비와 유학비를 쓰느라 허덕이며 자녀에게 충분한
가정교육과 사랑을 주지 못하는 비극적 인생의 윤회가 반복되는데,
그것이 문제라고 알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한 참정 능력이나 지혜가
없다면 그다음에 기다리는 삶이 나아질 리 절대 없습니다.

나의 인간성과 민족의 민족성을 올바로 지키고 발전시키면서도 밥벌이를
잘 할 수 있는데, 잘 먹고 잘 살려면 그런 것은 희생해야 하는 듯 돌아가는
현상에 숨어 있는 음모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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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잘 산다는 나라들은 근세에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호전적으로 오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약탈하여 부자가 된
경우입니다.

그 결과 식민지는 물론 본토에 많은 이민족이 혼합되어
민족주의를 내세우면 통치에 갈등이 생기는 상황이 되었으니
민족주의를 숨기고 애써 다민족 다문화 융화 체계의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피지배 집단의 민족의식은 그들에겐 골치일 뿐이므로,
한때 그들의 로맨스였던 민족주의가 이젠 불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그들의 겉모습과 주장만을 보고 "앞으로 잘 살려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우자."라는 주장을 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주변국과 리더쉽



좋아보이는 그릇은 술을 담든, 차를 담든 늘 쓸모가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예전엔 술을 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차를 주로 담습니다. 두 가지를 다 마셔보기도 하고, 어느 하나도 없이 오래 지내기도 해보니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가려집니다.

정치든 종교든, 저가 선택한 특정 방향은 없습니다. 단지, 거짓과 불공평 그리고 그것들의 도구인 폭력이 싫을 뿐입니다. 비 폭력은 제가 바라는 것을 찾는데는 절대 명제이지만, 저와 주변에 작용하는 폭력에 대해서까지 비 폭력으로 저항하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여하한 형태의 무저항이므로 거짓과 불공평을 세우려는 폭력에는 형태를 불문한 저항을 할 것입니다.

고상한 방법의 고마움을 알 만큼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짓과 불공평을 숨기고 치장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장이를 군자로 예우하면, 그들이 군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거짓말장이를 고상하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으로 황금이나 힘을 얻은 자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의 페어 플레이는 얻은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일 뿐인데, 다른 것으로 페어 플레이를 대신하겠다는 것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짓입니다. 거짓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은 천지 만물의 이치와 전혀 맞지 않는 일이고, 이 꽃에 속아 넘어가느니 오로지 그릇된 인간의 얄팍한 탐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에 기대어 일어나고 거짓되기를 고집하는 집단을 혐오할 뿐입니다.

일본의 동근동조 운운은 진심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약탈에 합리성을 넣으려는 말뿐인 거짓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피가 섞였더라도 나의 것을 가로채려는 자를 누가 형제로 여기겠습니까? 욕심이라는 휘발유를 먹고 굴러가는 능력이 남에게 좋은 일을 할 까닭이 없는바, 누가 그 능력을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와 출발이 같은 형제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잘 살고 인자하다면 그 형제를 본받아 같은 모습이 되고 한 마을에서 늘 서로 기대어 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漢족은 자신들이 힘세고 대우받아야하는 사람들로서만 늘 생각하고 있으니 주변과 동격의 형제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타이권의 종족 끼리는 그런 종류의 장벽은 없으므로 우리가 인자하며 본받고 싶은 형제의 모습이 될 때, 그들 사는 곳의 어디에 가더라도 환영받고 우리 말을 쓸 수 있으니, 국경과는 상관 없이 우리가 누리는 영역은 넓고 자유로와질 것입니다.

원론에서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거짓이 지배하고, 거짓에 참여하도록 탐욕이 부추겨지고, 그 탐욕에 의한 힘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되었을 때, 존경과 선망을 받으며 세상을 이끌어 갈 이상적이고 인자한 형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일관성 있는 역사의 궤도에서 흘러가며, 우리는 그 궤도를 보고 운명의 방향을 선택해야 합니다. 탐욕과 거짓의 운전대로 각성과 현실의 궤도를 주행하기란 불가능합니다.

2011년 1월 19일 수요일

10월 4일의 연어 낚시

지난 주 월요일에 이어 오늘도 메주콩 님의 차편에 베더-칠리왁 리버로 낚시를 갑니다.

근처라고는 하지만 매번 저의 집을 들러 픽업해 주시는 메주콩 님의 호의는 대단한 행운인 한편, 제가 주로 받기만 하니 늘 황송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가는 길에 전 선생님, 전 선생님의 붕우이신 김 선생님, 바다별 님께서 합류해서 오늘은 다섯 사람이 낚시 친구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방문한 곳은 키스 윌슨 다리 아래. 동쪽에는 이미 여러명이 빼곡이 낚시를 하고 있는데, 다행이도 지난 주 낚시를 하던 서쪽은 비어 있었습니다.

주차를 하고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보니 벌써 일 미터가 넘는 스프링이 잡혀 있습니다.


낚시를 시작할 때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습니다. 이를 예상하여 준비한 바, 잘 보이는 형광 연두색 얀을 입힌 바늘을 두 번째 교각 너머로 던져 넣고 흘리니 15미터쯤 흘러가다 바로 입질이 옵니다. 그래서 끌어올린 것은 중간 크기의 살찐 스프링. 상태도 제법 좋습니다.

낚시대를 초리 휨새의 감도가 대단히 빠르면서 허리가 강한 것으로 쓰니 채비를 건드리는 모든 움직임이 손에 즉각 전해져서 고기를 쉽게 걸기도 하고, 끌어내기도 쉬워서 웬만한 크기의 고기는 싱겁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좀 이어서 메주콩 님의 낚시에 걸려 번쩍이는 코호가 선을 보입니다.


이어서 계속되는 스프링의 입질 끝에, 크기가 좋은 첨도 걸려줍니다.

바다별 님의 낚시에도 꽤 큰 첨이 한참을 버티다가 끌려 나왔는데, 마지막에서 뭍으로 밀어내겠다고 들어간 제 뒤로 얼른 돌아서 도망갑니다. 혼자서 주로 낚시다니던 저에게는 동행의 낚시를 돕는 요령이 부족합니다.


오붓하게 낚시를 즐기다 보니 두 어 시간이 금새 지나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시작합니다.

낚시 장소를 윌슨 로드 상류 지점으로 정하고 자리를 떠납니다. 윌슨 로드 상류에 당도하니 건너 편의 급류가 감돌며 떨어진 아래의 완류대에 많은 점프와 몸놀림이 보입니다.

수위가 더 낮으면 여울을 건너 좋은 위치에서 낚시할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심한 물결이 이 쪽 강변을 깎아대며 흐르는 까닭에 고기를 걸더라도 느린 흐름이 전혀 없는 이쪽에서 고기를 끌어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고기를 걸어서 손맛을 보기는 무척 보았으나 막상 끝마무리까지 간 것은 크기가 작은 잭 스프링 세 마리와 첨 한 마리, 그리고 그 어려운 조건을 제압한 메주콩 님께 항복한 스프링 한 마리 입니다. 그래도 모든 일행이 협력하며 상황을 극복하며 성과를 거두니 그 나름의 재미와 보람이 있습니다.



급류에 날뛰는 고기와 씨름하다 생긴 열기와 기대 이상 좋은 날씨로 한껏 땀에 젖은 몸을 강 언덕에 앉아 쉬게 하며 전 선생님께서 주신 맥주를 한 캔 들이키고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 바람과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 천국이 바로 이곳입니다!


약간의 손맛을 더하고 꿀맛 라면으로 요기를 하니, 며칠이고 계속 낚시만 하고픈 생각이 간절해지며 하루가 너무 짧게만 느껴집니다.

함께 동행하고 배려해 주셔서 통쾌한 오늘 하루를 만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