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6일 목요일
플라맹코와 선비 정신
요즘엔 특히 플라멩코를 자주 듣는다. 듣기 뿐 아니라 유튜브에서 찾은 플라멩코 장면도 열심히 들여다 본다. 사실, 플라멩코는 듣는다기 보다는 그 기운과 느낌이 피와 심장에 파고들어서 응집했다가 다시 분출하는 쾌락과 전율을 맛본다는 것이 더욱 옳은 표현이다.
플라멩코를 듣고 보며 몸 장단을 맞추고 괴성까지 지르는 내 모습이 의아한 아내는 "그게 다 그것 같이 들리는데 그렇게 좋으냐." 하고 묻는다.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한반도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데, 그럴 수 없다면 플라멩코의 본산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집시로 태어나고 싶다. 그뿐인가? 듣는 음악 중에서 하나 둘씩 포기해야 한다면 플라멩코의 녹음이 가장 늦게까지 남을 것이다. 사는 가치관이나 모습은 시대 착오적 선비나 골수 나치 당원 같은 사람이 집시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니 아내는 의아함을 더욱 떨칠 수 없다.
플라멩코는 본시 귀로만 감상하라고 연주된 것이 아니기에, 귀로만 듣고 느껴 보고자 하면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집시의 인생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보기에, 집시로서 찾거나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인생은 예술적 쾌락이 지배하는 인생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쾌락을 포기할 만큼의 재물과 질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른 인종의 눈에는 게으르고 비천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철저한 무지일 뿐, 그들의 예술적 몰입과 자유로서 가름되는 잣대로 보면 소위 현대화 된 다른 인종들이야말로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맛과 향의 극치를 모른 채 사회적으로 세뇌되어 인생을 낭비하는 바보들일 뿐이다.
플라멩코는 여럿이 모여 함께 격렬한 예술적 쾌락의 세계로 몰입하는 과정이다. 연주하는 사람과 노래하는 사람이 있지만 낭송이 겸해지기도 하며, 그러한 정도의 재주가 없는 사람도 손뼉을 치거나 발 장단을 구르고 탄성과 입장단을 붙이며 감정이 이끄는 대로의 표정과 몸짓으로 각자 빨려들어간 세계에서 온갖 희열감을 맛보고 나타낸다.
이러한 몰입과 희열의 경지에 삶을 철저히 맡긴 사람들이 바로 집시이므로, 정 반대의 길에서 사회적 가치에 세뇌된 눈으로 보면 사회의 이익과 가치에 순응하지 않는 쓸모없고 해롭기까지 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기에 집시를 반기는 사회는 세상에 없다. 따라서 집시는 사회의 오물과 기생충으로서 멸시와 탄압을 받아왔다. 오죽하면 질병과 사회의 냉대를 풍자한 집시 속담에 집시가 갈 수 있는 곳은 병원, 감옥, 무덤의 세 곳 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동유럽의 집시는 절대로 음식 동냥을 받지 않는데, 음식에 독을 타서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집시가 되보고 싶기도 하다. 한반도인으로서 생의 최고 가치를 선비적인 삶으로 이루고 싶은 것, 즉 철학적 관점으로 완성된 삶을 찾는 것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될 수 있듯이, 예술과 자유에 철저해진다면 바로 그 길이 집시의 삶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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