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앞서 간 친구들을 생각하며
따스한 봄이 되고 나무엔 연록색 싹이 돋기 시작한다. 봄은 만물의 시작인가?
지역 신문에는 어느 때 보다도 많은 부고가 실린다. 만물의 움을 틔우려면 해묵은 옷은 같은 때 버려지는 것인가?
쓰다 나온 레코드를 수집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슬픈 소식을 알리는 부고가 한편으로는 뭔가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알리는 자명종이기도 하다.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수집품인 레코드가 주인을 잃고 자선 판매장에 기부되는 일이 흔해지고, 수집가들에겐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이민온 지 만 13년, 그 동안 사귄 친구도 많은데 벌써 3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중 미국인인 피터는 죽음이나 레코드 수집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오르는 친구다. 우리 어머니와 같은 해에 태어난 피터는 턴테이블 수리를 알아보려 가게에 들른 손님이었다.
며칠 뒤 다시 들른 그와 한담을 나누게 되었고, 우연히 코소보 사태에 대해 서로 말하게 되었다. 그는 코소보에 미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이었고, 나의 주장은 외부 개입은 자연적인 균형을 오히려 방해하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담은 점차 토론의 형태로 발전했고, 피터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 한국에게 도움을 준 미국이 고맙지 않는가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한국전쟁의 발단은 분단이고, 분단에는 미국도 50% 이상의 책임이 있는바 고맙기는 커녕 원망스러울 뿐이며,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 부터가 미국인으로서의 우월감과 편향된 역사 지식에 의한 편견이 있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리고는,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 당시에 생겼던 일들을 객관적 시각에서 보지 않는 무지한 미국인과는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쫓아냈다.
며칠 뒤, 가게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 민 피터가 크게 외쳤다. "나는 한국 놈이 싫다." 나도 외쳤다. "나도 미국 놈이 싫다." "너의 가게에 들어가도 되냐?" "왜?" "이야기하고 싶다." "공부나 반성은 좀 했냐?" "그런지는 이야기해보면 알 것 아니냐?" "그럼 들어와라."
그와 나 사이에 코소보나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다시 없었다.
그는 35년간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 여객기 조종사와 관리자로서 일하다 부사장의 직위에서 은퇴한 베테랑이었다. 고등학교때 수학 경시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던 그는, 집안 전통을 따라 의사가 되고자 16세의 나이에 의대 장학생으로 조기 입학한 적도 있으나, 당신의 꿈을 대신 이루도록 조종 교습을 몰래 지원한 할아버지 덕으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고 의대를 뛰쳐 나왔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크게 실망했으며, 훗날 국제선 여객기의 기장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와는 서로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조종사로서의 성장은 제트 여객기의 발달 및 세계사의 격동과 동조되어, 직업인으로서는 남다른 기회를 누렸다. 월남전 당시에는 공군 장교로서 조종 교관이기도 했으며, 비아프라 사태가 있었을 때 아프리카에서 조종사로 일하기도 했고, 이란 왕정의 파국에서는 팔레비 이란 국왕을 프랑스로 도피시키는 비행을 맡는 등 그야말로 화려하고 극적인 인생을 겪었다.
그와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동안, 그가 미네소타 방송국에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적이 있는 음악 애호가이며, 직업 사진사로도 잠시 일한 적이 있고, 자동차, 원예, 목공, 요리에도 깊은 식견과 능력을 갖춘 교양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후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일터에 들르는 그는 나에게 좋은 친구요, 스승이요, 조원자가 되었다. 나로서는 그의 경험담을 듣노라면 그 흥미로움에 시간가는 줄 몰랐으며, 그로서는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흔한 욕심과 힘에 아랑곳 없이 당당하고 솔직한 나의 태도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남겨진 인생이 암에 의해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행기 사고로 앞서 간 아내 뒤에 남겨진 그는 미국의 대도시에서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두 아들과 떨어져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인 밴쿠버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니, 정리라기보다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의 생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은 작별의 순간을 맞기에는 너무도 절절했으며, 진통제가 가져오는 혼미함과 싸우는 그의 투명한 인식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반추하여 영원히 새기고자 발버둥쳤다.
그의 집착은 생명 뿐 아니라 금전에 대해서도 남달랐는데, 쌍발 자가용 비행기와 여러 부동산을 소유할 만큼 재력이 있었는데도, 스스로 먹는 치료약의 가격에 질리기도 하고, 고양이 밥의 가격을 판매점 별로 몇 전 차이가 나는지까지 기억할 정도로 이재에 집착을 하곤 했다. 그러한 그를 스크루우지라고 흉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내게, 그는 구두쇠 기질로 유명한 스코클랜드인의 후예이며 집안 내력에 그런 피가 흘러서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6000장이 넘는 레코드가 있었는데 각 레코드 보호지에는 언제 누구와 들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요약이 되어 있었다.
삶의 흔적이 진하게 담긴 레코드와 헤어지는 것이 몹시도 쓰라렸던 그는 모든 레코드를 고스란히 나에게 물려주고자 유산 집행인에게 유언을 하였고, 잘 아껴달라고 내게 당부했다. 그러나 피터와의 생에서 관계가 평탄하지 않았던 유산 집행인은 피터의 유언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다.
나의 사고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을 가족 밖에서 순서대로 꼽는다면 피터가 두번째이다. 그가 가식없이 우정을 담아 베푼 경험담과 생각은 나의 인식에서 새롭게 진화되었으며 나를 이끄는 커다란 부분이 되었다. 여러 친구들에게서 받아들인 그러한 쪼가리들이 많아지고 새로이 얽히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 둘 이 세상에서 사라져갈 것이며, 나의 쪼가리들 또한 어디에선가 흘러 다니는 가운데 나 역시 다른 곳으로 천천히 사라질 것이다.
앞서간 친구들의 명복과 재회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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